황영옥

황영옥 (1924년 8월 9일-2023년 6월 13일), 필명은 황행페인, 황소, 우부자이다.호남성 상덕현 (지금의 상덕시 정성구) 에서 태여나 본적은 호남성의 봉황현성이다.토족 사람.중국화원 원사, 중앙미술학원 교수, 판화과 주임을 지냈다.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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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옥 (1924년 8월 9일-2023년 6월 13일), 필명은 황행페인, 황소, 우부자이다.호남성 상덕현 (지금의 상덕시 정성구) 에서 태여나 본적은 호남성의 봉황현성이다.토족 사람.중국화원 원사, 중앙미술학원 교수, 판화과 주임을 지냈다.중국 미술가 협회 회원.[13]
황영옥은 초등학교와 불완전 초급 중학교 교육을 받았다.가정형편이 가난하여 12살 때 외지에 나가 생계를 꾸리고 안휘, 복건산구 소자작업장으로 류랑하여 아동공으로 일하다가 후에 상해, 대만과 향항으로 전전하였다.14살 때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한동안 판화를 전공하였으며 독특한 풍격을 띤 판화작품은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쳤다.16살 때부터 생생한 그림과 목각으로 생계를 꾸렸다.도자기장 소공인, 초등학교 교원, 중학교 교원, 가중교육관원, 극단 견습미술대원, 신문사 편집자, 영화극작가 및 중앙미술학원 교수, 중국미협 부주석, 중국미협 제9기 고문[1],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 제10기 명예위원을 지냈다.
2020년 6월 4일, 황영옥은 2019년도 공개경매시장 작품총거래액 인민페 3700만원으로"2020 호윤중국예술순위"17위에 올랐다.[22] 2021년 8월 16일, 인민문학출판사는 황영옥의 새 책을 예매하고 그에게 생일 (음력 생일) 을 축하한다고 선포했다.
2023년 6월 13일 3시 43분, 황영옥이 서거했다.

가정형편이 가난하여 12살 때 외지에 나가 생계를 꾸리고 안휘, 복건산구 소자작업장으로 떠돌아다녔다아동 노동후에 상해, 대만, 향항으로 전전하였다.
14살부터 작품 발표, 한동안 주공판화, 독특한 스타일의 판화 작품은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16살 때부터 생생한 그림과 목각으로 생계를 꾸렸다.
도자기장 소공인, 초등학교 교원, 중학교 교원, 가중교육관원, 극단 견습미술대원, 신문사 편집, 영화작가 및중앙미술대학교수님,中国美协副主席。
黄永玉除了绘画外,还精于篆刻,刀法潇洒出尘,令人叹为观止,但他平生从不为人篆刻,平生只为朋友制过两枚印章,一枚为50年为其妻张梅溪所制金文藏书印“梅溪藏书”,另一枚则为近几年来所制,在《平凹散文》(浙江文艺出版社2008年4月第一次印刷版)中《画家逸事》一文中曾提到黄永玉先生托 世南先生为石鲁先生带去一方石印(上海钱瘦铁所制),似为此印。
黄永玉1952年偕同夫人张梅溪由香港回북경,被安排在中央美术学院工作。先后担任副教授、教授、中国美术家协会副主席等。
1956年就出版过《黄永玉木刻集》,其代表作“春潮”“阿诗玛”,曾轰动了中国画坛。“文革”期间,被“四人帮”指控为反动学术权威受到批判。而后,又因为在“北京大饭店”画了一幅《猫头鹰》遭到残酷迫害,被遣送回家乡凤凰。“四人帮”倒台后回北京。黄永玉擅长판화,主攻国画,其画构思奇特,造诣精深。
1978年,英国《泰晤士报》用了六个版面,作了专题报道了黄永玉的其人其画。
1980年,《黄永玉画集》由香港美术家出版社出版。国内多家出版社相继出版了黄永玉的《湘西写生》《永不回来的风景》《黄永玉》等多本画册。
黄永玉自学美术,文学,为一代“鬼才”,他设计的猴票酒鬼酒包装家喻户晓。有《永玉六记》《醉八仙》《吴世茫论坛》《老婆呀,不要哭》《这些忧郁的碎屑》《沿着塞纳河到翡冷翠》《太阳下的风景》《无愁河的浪荡汉子》等书。画过《阿诗玛》、生肖邮票《猴》和毛主席纪念堂山水画等。在澳大利亚、德国、意大利和中国内地、香港开过画展,其美术成就曾获意大利总司令奖。在海内外享誉甚高。
黄永玉对家乡更是一往情深。近些年他满世界地走了不少地方,却始终未曾有一刻忘怀自己的故乡——美丽的凤凰城。他认为故乡是一个人感情的摇篮,它的影响将贯穿人的整个一生;故乡是自己的被窝,或许它的气味并不好闻,但却是自己最熟悉而又无可替代的气息。他在一首诗中写道:“……我的血是O型,谁拿去,它对谁都合适。我的心,只有我的心,亲爱的故乡,它是你的……”
2010年8月31日下午,在北京钓鱼台国宾馆芳菲苑,黄永玉被聘为中国国家画院版画院院长。 [3]
中国文学艺术界联合会第十届荣誉委员 [4]

개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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